"이런 논의는 이제 그만 합시다"
프레시안 | 기사입력 2008.06.08 06:15
[프레시안 편집=강양구/기자]
지난 4월 시작한 '과학과 종교의 대화'가 독자의 뜨거운 관심 속에서 진행 중이다. 많은 독자는 과학(장대익 교수)과 신학(신재식 교수) 사이의 날선 대립과 이 대립 속에서 새로운 쟁점을 끌어내는 제3의 입장(김윤성 교수) 간의 서신 교환을 지켜보면서 근래 보기 드문 지적 긴장과 유희를 느꼈을 것이다. < 프레시안 > 은 이 '과학과 종교의 대화'가 더욱더 풍성해지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독자 의견을 소개한다. 이 독자 의견은 연재에 달린 댓글과 편집자에게 보낸 기고 중에서 향후 논쟁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선택한 것이다. 앞으로 이 독자 의견을 염두에 둔 서신 교환이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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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사랑
들 고개를 쭉 내밀었다. 스님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라고 자답했다. '행복'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세속
의 행복이고, 또 하나는 부처의 행복이죠."
지는 겁니다." 반면 '부처의 행복'은 안을 향한다고 했다. "부처님은 '세속의 행복'에 만족하지 않으셨죠. 행복이 뭔가요.
운문 스님이 말한 '날마다 좋은 날'이죠. 밖을 향하는 세속의 행복은 '날마다 좋은 날'이 되질 못합니다. 밖에서 얻은 게
채워질 때만 행복한 날이니까요."
일매일 행복해질 수 있는 원리를 찾아간 겁니다. 그 원리는 지금에도 유효합니다. 중국에서도 숱한 선사들이 그런 행복
의 원리를 찾아 나섰고, 또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일은 아니죠. 그러나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행복의 원리'를 이해만 해도 일상이 바뀝니다. 나를 해치는 일도, 남
을 해치는 일도 하지 않게 되죠."
팔만대장경을 압축하고, 압축하고, 압축하면 한 글자가 된다고 했다. 바로 '반야심경'에 나오는 '오온개공'의 '공(空)'자
라고 했다. "불교의 '공'을 절대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공'은 아무것도 없고, 허망하고, 허무한 게 아닙니다. '공'은 우리
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걸 굉장히 지혜롭게 만듭니다. 그걸 '마하반야(큰 지혜)'라고 합니다. 마하반야로 살면 '날마다
좋은 날'이 되는 겁니다."
둘이 아님을 알게 되죠. 큰 공동체를 알게 되면 '매일 매일 좋은 날'이 안 될 수가 없죠. 지구상에는 하루도 전쟁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환경문제도 갈수록 심각해지죠. 이 모든 문제에 대한 대안이 '선(禪)'입니다." (항저우=백성호 기자, < 중
앙일보 > 2008년 3월 13일)
졌습니다. 부도 명예도 왕의 지위도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매일매일 행복해질 수 있는 원리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신앙을
깨치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신앙의 원리를 이해만 해도 일상이 바뀝니다. 나
를 해치는 일도, 남을 해치는 일도 하지 않게 됩니다. 성경이 바로 예수의 깨침입니다. 하지만 현대인은 바쁘고 그걸 깊
이 공부하긴 쉽지 않습니다. 성경을 압축하고, 압축하고, 압축하면 한 글자가 됩니다. 바로 믿음, 소망, 사랑의 '사랑'입
니다. '사랑'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허망하고 허무한 게 아닙니다. 사랑으로 살면 날마다 좋은 날이 됩니다. 사랑을 이해
하면 공동체 의식이 온 우주로 확장됩니다. 생명 있는 것과 생명 없는 것, 즉 이 모든 우주가 나와 둘이 아님을 알게 됩니
다. 큰 공동체를 알게 되면 매일 매일 좋은 날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문제에 대한 대안이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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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무신론자가 세 분 선생님께
씀부터 드립니다. 선생님들이 바다라면 저는 바닷가 조개 줍는 소년정도 될 듯합니다. 제가 아는 조개들만으로도 재밌었
는데 선생님들 덕에 수많은 조개들을 새로이 접하게 되어 긴 시간동안 즐거울 것 같습니다.
다. 세 분 선생님께서는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일반인들의 생활에서 정치와 종교는 대화에서 금기입니다. 정치는 좀 다를
수 있겠지만 상대방의 종교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대단한 무례로 취급받습니다. 얼마 전 방송에서 종교계의 비리를
다뤘을 때에도 일반적인 사회 비리를 다뤘을 때와는 달리 술자리에서 대화가 상당히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공개적으로 종교와 과학에 대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이런 자리가 아니면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하는 방법의 문제입니다. 그 믿음은 단순히 사실을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인식하는 틀의 문제이기에 자
신의 존재에 관한 이야기가 됩니다. 종교라는 인식 틀로 세상을 보고 있는데 그 인식 틀을 부정하면 자신의 존재도 사라
지기 때문에 종교에 관해서는 비타협적으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종교에 관한 이야기는 자신의 존재에 관한 공
격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따라서 대화에서는 금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적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것은 절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면 차가 나아가는 세상에 살고
있는데,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러니 종교와 과학은 적절한 타협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
것은 일시적인 휴전이 아닌가 합니다. 서로가 세상을 인식하는 틀이 다르니 투항자는 있어도 어느 한 쪽의 승리 이전에
는 결론이 나지 않을 듯합니다.
사람이 건물이 무너져 다쳤다고 했을 때 모든 인간은 왜 그랬는지를 설명하려고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합리성이라는
것이 자신의 인식의 틀 안에서 설명할 수 있을 때 합리적인 것인데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은 부실공사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왜 그 시간에 그 사람이 거기에 있었는지 나비이론을 이용해서라도 그 시간에 북경에서 나비가 날개 짓을 했는
지까지 고민합니다. 그러다가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아직 잘 모르겠다,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하지만 종교적으
로 사고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인식하지 못 하는 부분은 신의 뜻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초자연적 존재를 설정하여 합리
성을 완성하려는 것입니다.
과 더불어 그리스도교 담론의 성격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습니다"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께서 말씀하신 서양 정신에서 '로고스 중심주의'는 서양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특성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인류의 보편적 특성으로서의 합리성이 기독교를 넘어서 이슬람교, 불교 혹은 기타 다른 종교를 설명하는데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인류의 보편적 특성인 합리성이 종교와 과학 간의 대립을 만들어 내고 제가 무신론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인 듯합니다. 세상을 인식하는 틀로서는 종교보다는 과학이 오류가 더 적으니까요.
로울 게 없는 것이어서 별다른 흥미를 끌지 못 했습니다. 오히려 더 공격적인(?) 제목을 붙인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 신
은 위대하지 않다 > (김승욱 옮김, 알마 펴냄)를 재밌게 읽었습니다. 제 옆자리 동료가 독실한 크리스천인데 보란 듯이
책꽂이 꽂아놨습니다. 그 분도 관심을 갖길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제 동료가 요즘 저 때문에 피곤할 듯합니다. 제가 동
료를 개종시키려고 많이 노력 중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과학과 종교의 대화에서 우선적으로 대화를 주도한 것은 종교였습니다. 비종교인을 종교인으로 만
들려는 노력이었죠. 어떻게든 종교를 대화의 소재로 삼아서 전도를 하려고 했습니다. 저 같은 무신론자들은 그 대화가
어떻게든 빨리 끝나기를 바라며 종교인들을 흔히 말하는 '도를 믿으십니까?'로 치부해 버렸습니다. 그 만큼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당연시 되는 분위기였습니다. 종교란 개인적인 것이며 공적인 영역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었으니까요. 나
오면 무시되는 분위기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종교인들이 공적인 영역으로 나
오기 시작했습니다. 과학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위기감이었습니다. 도킨스의 표현대로 종교가 바이러
스라면 그다지 큰 피해를 주지 않을 때는 넘어가려고 했지만 이제 숙주의 생존을 위협할만한 상황이 되었기에 참을 수
없다는 표현이 적당할 듯합니다.
저를 상당히 불편해 합니다. 자신들의 논리에서 취약한 고리를 계속해서 짚어내거든요. 만약 광신도라면 저를 사탄을 보
듯 하겠지만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과학적 사고 안에서 생활을 하고 있으니 제 말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못 합니다. 제
가 가진 인식 틀과 자신의 인식 틀이 맞는 부분이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더 큰 인식 틀을 부정해 버리니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라서 어쩌지를 못 하고 불편해하고 대화를 피하려고 합니다. 저는 계속해서 그 불편함을 자극하여 개종을
시키려고 합니다.
삶의 방식이 개인의 생활만을 규정하는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우리는 개인의 삶의 총합으로서의 사회를 구성하고 그 사
회의 일부분인 개인으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식 틀은 하나만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독선적
이라고 할 수 도 있겠지만 현대 사회에서 왕정이나 독재를 나름의 정치 방식이라고 인정할 수 없듯이 종교적 인식의 틀
은 우리가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데 방해가 되고 있습니다. 신정국가라는 비아냥거림을 듣고 있는 미국의 예를 보
듯이 말입니다.
를 최소화 하려고 합니다. 종교가 인간의 유한성을 넘어서기 위해 절대를 설정하는 순간부터 종교는 모순에 빠진다고 생
각합니다.
교 깨뜨리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중간 중간 글이 엉킨 부분이 많아서 부끄럽기도 하지만 세 분 선생님께 더 많은 조개를
바라는 후학의 칭얼거림이라고 너그럽게 생각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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